소설 <등대섬>
(제 2번째 소설 <등대섬> 재교 수정본을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아래 글은 소설에 수록될 '작가의 말'입니다.)
소설 <등대섬>
‘등대섬’은 21세기의 소도(蘇塗)입니다.
판단이 멈추는 곳, 추격자들이
발길을 돌리는 곳, 쫓겨 들어간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끌어안아주고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곳입니다. “왜”라는 질문이 더 이상 의미 없는 먼 남쪽 바다 한가운데 뚝
떨어진 외딴섬. 밤 바다에 빛을 비추고 낮에는 하얀 신호로 서 있는 등대는, 그래서 ‘솟대’입니다.
“이 등대섬에서는 하느님이 별로
하실 일이 없지!”
남자 주인공 이현우의 아버지가 어린 현우를 데리고 교회 언덕을 올라가면서
들려주었던 말입니다. 그 현우가 나중에 그 등대교회 목사로 돌아오고,
어느 날 섬을 떠날 것을 다 안다는 듯, 언덕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내는 분입니다.
“한 사람이 걸었다고 길이 되지
않는다. 사람이 가고 오고,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소설 <등대섬>은 존재(Being), 그중에서도 궁극적인 존재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피부 한 껍질을 벗기면, 벌겋게 떨며 피 흘리는
다른 살(Flesh)이 있고, 그에 따라 내 살도 함께 울고, 함께 떨고, 함께 고통받으면서 다른 살과 연합하는 ‘관계’를 삶이라고 밝힙니다. ‘처치’는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며 약 발라주고 싸매고 끌어안고 위로한다는 말입니다.
육지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하고 세상 끝이라고 불리던 고향 등대섬에
돌아온 현우, 악어가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젖먹이 아들 안고 섬으로 피해 들어온 미숙. 이미 세상 끝에서 ‘등대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어른들은 가장 위험스러운 침입자가 될 수 있던 두 사람을 끌어 안아 등대섬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면역은
침입자를 멸절(滅絶)시키지 않고 내 몸안으로 받아들여 함께
살아갈만하게 바꾸는 작용입니다. 미숙은 상처가 큰 만큼 오히려 쉽게 마을 어른들이 이뤄 놓은 세상에
편입되지만, 등대교회 목사 이현우는 그의 신앙과 교리가 섬을 바꾸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여 달 밝은 밤
배를 타고 떠납니다. ‘성찬식’을 치루지 못할 만큼 상처가
깊은 마을 어른들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남집사가 털어 놓은 ‘케리그마가 없다’는 불만을 해소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감당’이라는 말은 주인공 이현우가 감당할 책임의 몫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어 물러나는 현우는 나이 먹은 ‘얼굴 하얀 어린애’였을
뿐입니다.
다시 섬에 돌아온 현우는 그가 몸 담았던 종교의 가르침이 등대섬
공동체가 이루는 삶을 지연시키려는, ‘억지자(Katechon)’이었음을
깨닫고, 목사직을 내려 놓고 등대섬에서 가장 젊은 일꾼으로 살아갑니다.
<소설 예수> (2020-2022. 전 7권. 나남출판사 발행)에 뒤 이어 3연작의
두번째 소설 <가보지 못한 길>(Way Never
Taken)을 현재 집필 중이지만, 맨 마지막 소설
<등대섬>을 먼저 내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나이 일흔 여섯, 아마 마음이 급한 모양입니다. <소설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고백되기 이전’의 예수를 그렸고, 쓰고 있는 <가보지 못한
길>을 통해 우리가 놓쳐버린 다른 가능성들을 더듬고 있습니다. 이
소설 <등대섬>에서는, 제도 종교 밖에서도, 그리고 제도종교가 사라진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
<소설 예수>에서부터 붙잡고 내려온 제 화두입니다. 그것은 ‘사람 사이의 관계, 태도’가
남는 자리일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누구도 구원하지 않고, 누구도 단죄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서로 등을 돌리지 않는 선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고 있을 뿐입니다.
“어릴 적 너를 찾아가서 위로하고
끌어안아 주면 안 되겠니?”
소설 끝 무렵, 현우는 ‘어린 시절의 자기’를
찾아가 위로하고 끌어안습니다,
현우는 타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섬에서 가장 젊은 일꾼이라는 마음으로 봉사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돌보지 못한 것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상처 입은 아이, 자기 내면의 어린 현우였습니다.
아버지를 기다리며 홀로 밥을 먹던 아이, 엄마의 부재를 견뎌야 했던 아이, 그리고 미숙과 은혜에게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하면서 ‘감당’이라는
말만 되뇌던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고
끌어안아야 타인을 진정으로 품을 수 있습니다. 현우가 ‘어린
현우’를 안아준 일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각
회복’입니다. 자기를 끌어 안을 수 있었기에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는 새 입주민들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현우가 종 줄을 풀어 놓아서
바람이 불 때마다 교회 종탑에 매달린 종이 뎅그렁 댕댕 울립니다. 등대는 찾아오라는 부름이 아닙니다. 그 불빛을 보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하라는
신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섬으로 쫓겨 들어온 사람에게는 ‘여기가
소도’라는 솟대입니다. 더 이상 날카롭게 경계를 가르는 감시의
빛이 아니라 외로움까지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드러워진 빛을 내 보냅니다.
등대섬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 ‘등대마을’을 이루는 곳입니다.

作家님...
답글삭제수고 많으셨습니다.
出版되면,
꼭 읽어보고 싶어요!
韓賢實拜上.
감사합니다. 재교에 따른 수정본을 출판사에 보냈으니 아마 2월 - 3월에 출간될 것 같습니다.
답글삭제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답니다.
답글삭제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한 현우는 거듭 난 걸까요? 진정한 등대섬 사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