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과 의례

 

연극과 의례(儀禮)

 

<소설 예수>에서 나사렛 예수가 헬라 연극을 관람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의 서사에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마을에서부터 갈릴리의 왕도(王都)였던 세포리스(Sepphoris)까지는 약 6km, 남자 걸음으로 한 시간에서 한 시간 30분 거리입니다. 목수 석수 일을 겸했던 아버지 요셉을 따라 세포리스에서 극장 건설 일에 예수는 일용 노동자로 일한 것으로 썼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이 창조한 애기입니다. 그러나, 당시 세포리스에 의존하는 나사렛의 경제상황, 극장건설에 관한 역사적 고증, 목수(Capenter)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래 의미 등을 바탕으로 당시의 맥락(Context)에 따라 구성했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큰 도시 세포리스 얘기를 일부러 생략한 복음서보다 훨씬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20 여년 전, 나사렛 마을에서 시오리 떨어진 큰 도시인 세포리스의 극장이 완공되었을 때, 갈릴리 분봉왕은 주변 농촌 마을에 사는 주민들도 구경하도록 헬라 연극을 개방한 적이 있었다. 나사렛 마을 촌장을 비롯한 동네 어른들은 연극구경 가고 싶어 안달하는 젊은이들과 애들을 단속하며 극구 말렸다. 그러나 반역을 모의하듯 수군거리며 몰래 동네를 빠져 내려가 젊은이들은 세포리스 길을 달렸었다.

그 틈에 끼어 구경한 연극은 새로운 문화였고 충격이었다. 경험할 수 없었던 경험을 전해주었다. 신이든 영웅이든 비천한 종이든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해당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연기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역할은 실제가 아니었다. 또래의 동무들과 달리 연극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틈과 상징성을 예수는 알 수 있었다.

-<소설 예수>에서-

 

연극을 보면서 배우와 그가 맡은 역할, 연극과 현실의 틈을 예수는 깨닫습니다. 연극은 관객이나 연기하는 배우나 연극을 마련한 사람 모두 똑 같이 알고 있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즉 현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제작했고, 내용을 구성했고, 배우들이 의도된 내용을 연기합니다. 관객과 배우들 모두 연극에 몰입하면 실제처럼 믿습니다. 실제 아닌 것을 실제로 믿습니다. 연극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분봉왕은 부족한 예산을 짜내서 헬라식 연극을 할 수 있는 극장을 세포리스에 세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행사
(Internet에서 가져온 image)

예수는 세포리스에서 보았던 연극을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떠 올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연극과 현실을 구분하라고 가르칩니다.

 연극입니다. 로마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유월절 해방을 기념하는 일은 스스로 속고 속이는 연극입니다. 헬라 연극과 같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 맞이하는 예루살렘 성전 유월절 행사는 예수가 보기에는 그저 짜인 연극에 불과했다. 정교하게 짜인 희곡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면 되는 엄격한 통제와 연기의 산물이다. 예루살렘성과 성전 전체가 커다란 무대가 된다. 유월절을 기념하려고 모여드는 모든 사람들, 유월절 제사를 주재하는 성전, 유월절을 통제하는 로마총독, 성전 뜰을 둘러싼 주랑건물 위에 늘어서고 안토니오 요새에서도 내려다보는 로마군 병사들, 모두가 맡겨진 역할과 허락된 범위를 지키고 감시하는 연극이다. 만들어진 이야기와 주어진 역할에 따라 배우들이 무대에 들어오고 나간다.

하느님은 무대 한편에 그냥 세워 석상(石像)이다. 무대에서 움직이거나 얘기하거나 소리칠 없다.

유월절 연극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미 성취된 현실처럼 느낍니다. 현실에서 결코 이룰 없었던 해방을 연극을 통해 환상으로 바꿉니다. 해방을 옛날,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일어났다는 번의 사건으로 기념하면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없도록 잘 마련한 장치에 따라 철저하게 통제합니다.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느님이 히브리인을 해방했다는 것이다. 연극을 주재하는 사람들, 성전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그리고 성전 관리들은 가능하면 현실과 연극의 틈을 크게 벌린다. 그러면 연극은 확실하게 현실 아닌 것이 되고, 달성할 없는 환상이 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꿈이 된다. 환상을 실현할 있는 유일한 수단이 하느님의 개입이라면, 그리고 그분의 직접적 개입이 있을 때에만 해방이 가능하다면 현실과 환상 사이에 아무리 틈이 크게 벌어져 있어도 이미 성전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개입하지 않고 침묵하는 하느님 책임이다. 히브리에게 가능했던 해방이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환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해마다 유월절 명절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에게 로마와 예루살렘 성전이 깊이 새겨주려는 자각이다.

-<소설 예수>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유월절 명절 제사와 의식을 연극화(演劇化)됐다고 깨닫습니다. 연극은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몰입하면 실제처럼 받아들입니다. 이에 반하여 의식화된 종교행위, 즉 의례(儀禮 Ritual)는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전제로 이뤄지지만 반복되는 형식만 남아 연극화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 1921 – 2007)의 표현을 빌리면 빈 상징(Empty Symbol)’이라는 얘기입니다.

성전 제사와 의례가 형식만 남은 실패한 연극이라는 진단과 함께 해방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 즉 로마제국의 통치와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공허함을 소설 속에서 예수는 지적했습니다. 저는 <소설 예수>를 통하여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만난다고 해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선생 예수를 그렸습니다.

예수를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제도종교 이후 시대를 맞게 되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

  1. 이해가 잘 되네요..늘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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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예리하고 귀한 내용이라 여깁니다. 소설예수 전권을 받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 선생님의 요약을 읽으니 소설예수의 맥락을 이해하게되니 차후에 읽을 때 좀 쉽게 이해하며 읽겠단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니 신영복선생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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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학자의 독생녀 발언.
    통일교인들은 아멘 했을지 몰라도 지나가던 개도 웃는다.
    믿는것이야 자유지만 말도 안되는 것을 믿으면 웃음거리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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