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Sacrifice)
희생(sacrifice)
<소설 예수>에서 ‘속죄의 희생제물 예수’라는
기독교의 중요한 신앙고백을 거부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얘기를 제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저명한 성서 역사학자이며 저술가인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도 저와 같은 의견이어서 다행입니다.
아래는 제가 <소설
예수>에서 그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믿음을 시험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개입하는 하느님—예수가 만난 하느님을 담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제발! 왜 그러세요?”
한낮 뜨거운 햇빛이 정수리에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산꼭대기. 겨우 몇 그루 나지막한 잡목이 서 있는 민둥산 꼭대기, 아들은 제단을
끼고 돌며 달아나고, 아버지가 힘겹게 그 뒤를 쫓을 때 풀썩풀썩 마른 먼지가 피어 오르던 모리아산 꼭대기. 그건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단절이었다. 사람이 그보다 더 멀리
하느님으로부터 떠났던 적이 있었을까? 아들을 붙잡으려고 헐떡이며 쫓아다니는 아브라함의 모습만 하느님의
눈에 보였을까? (1권 376쪽)
아들을 묶어 제물로 바치려고 쫓아다니던 아브라함이 넘어집니다.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고 다가온 아들 이삭. 아브라함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줄로 단 숨에 아들의 목을 두 세번 감아 묶습니다. 그리고 머리와 뒷목이 연결된 곳을
찌르려고 칼을 높이 듭니다.
그때 하느님이 개입했다.
그 하느님이 바로 예수가 만난 하느님이다. 그것이 예수가 해석한 하느님의 뜻이다. 그 순간에 예수는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얘기한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처음 만났다. 아브라함의 거동을 마지막 순간까지 침묵으로 지켜보며 그의 충성을 시험하는 하느님이 아니었다. 세상을 창조하던 그 마음으로 하느님은 개입하고 나섰다.
“멈춰라!”
“아브라함아! 네 손을 멈추어라! 이 미련한 놈아!”
“내가 대신
숫양 한 마리를 준비했다. 너희를 위해…. 제발 눈 좀 떠라, 이 놈아!”
(1권 378쪽)
아브라함이 아들을 놓아 주고 숫양을 잡습니다. 아들을
잡으려던 칼을 숫양의 뒷목에 깊게 박았습니다. 평소 양을 잡을 때보다 더 깊게 찔렀습니다.
아버지는 헐떡거리며 자꾸 헛손질을 했다. 아버지에게서
칼을 받아든 이삭이 숫양의 배를 갈랐다. 내장을 꺼냈다. 소름
끼치도록 따뜻하고 미끄러웠다. 살아 꿈틀거리듯 번들거리는 내장을 먼저 제단에 올려 불살랐다.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뜨고 한 덩어리, 한 덩어리 살을 발라 조심스럽게 불에 올렸다. 새로 고깃덩어리를
올릴 때마다 부지직 멈칫하던 불길은 다시 지글지글 맹렬하게 타올랐다. 하늘에는 독수리가 낮게 떠돌고
있었다.
아버지 요셉에게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얘기를 듣고 있던 예수 눈에는 직접 눈으로
보고는 듯 그 현장이 생생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이를 악물고 참았어요, 그 무서움을… 불 위에 던져져 지글지글 타는 고기 덩어리를 보면서 마치 자기 몸이 제물이 되어 탄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랬겠지”
“아버지! 왜 제사를 드려요? 그렇게 피를 흘리고 짐승을 잡고…”
예수는 그 이야기의 끝 맺음을 오래오래 기억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다시 사흘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이삭은 말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백 살에 낳은 귀한 아들인
이삭마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제물로 바칠 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는 아버지 요셉에게 여러가지를 묻습니다. 가슴에 떠 오르는 의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그건 질문이 아니고 예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 아니예요?”
그래서는 안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아닌 것처럼 되풀이 전해 주는 가르침. 그 가르침을 통해 예수는 깨닫습니다. 어쩌면 가르침을 뒤집어 듣고
깨달은 첫번째 사람이 예수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조상들은 늘 흘러내리는 붉은 피,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피로 하느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를 삼았다. 하느님을
인간의 욕망에 초대하는 부적이 피였다. … 아마도 카인에 의해 살해된 아벨이 땅에 뿌린 첫 피로부터
사람에게 주어진 저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권 384쪽)
이 장면이야 말로, 저는
예수가 ‘희생의 신학’을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새 소설 <등대섬>에서도 저는 같은 문제를 붙잡고 씨름했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등대섬에서는 누구도 희생자로
삼지 마세요!”
옛날부터 두려움을 이기려고 희생자를 찾아 바칩니다.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끝이라고 불리는 등대섬까지
밀려 들어와 살면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건너 섬에 들어온 등대섬 주민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믿음’ 마저 밀어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희생자를 찾지 말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면역체계(Immunitas)를
만들지 말라는 애기입니다.
한편으로는 유일신교로부터 시작한 서양과 달리 동양의 하느님, 동양의 아버지는 다르다는 것도 밝힙니다.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하느님 대신 사람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동양적 전복(顚覆)을 애기합니다.
“하느님! 저를 받아주십시오!”
아들을 묶어 제단에 엎어 놓는 대신 스스로 제단에 올라 꿇어 엎드리며 자기를 내
놓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일방적 명령과 복종 대신에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동양의 철학, 사상, 도덕, 윤리입니다. 그런
아버지이어야 아버지고,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돌려야 하느님입니다.
희생은 두려움이 만들어 낸 면역체계(Immunitas)입니다. 등대섬 사람들은 두려움을 끊어냈고, 믿음마저 밀어냈습니다. 새로 섬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누구인지’ 묻지 않습니다. 받아들이는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이뤄갑니다. 때가 되면 공동체는 점점 나이들어 소멸할 수도 있겠지만, 밀어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소설 예수>와 <등대섬>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등대섬”을 빨리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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