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

 

폭력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

<소설 예수>에서 서기 33년 유월절 전날에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합니다. 유월절은 우리 나라에서 기념하는 8.15 광복절과 마찬가지로 해방 명절입니다. 이집트에서 압제를 받으며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의 조상 히브리인을 하느님 야훼가 광야로 이끌어낸 해방을 기념합니다.

그 해방명절 전날, 사건이 벌어졌고 곧 소문이 퍼졌습니다.

사람이 죽었다

주어(主語)와 서술어(敍述語)만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른 소문이 또 떠돌았습니다. 역시 한 문장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살아났다.’

신학 철학 정치학 사회학 종교학 지리학 고고학 역사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수많은 학자들이, 문학 회화 음악 연극 무용 등 모든 분야와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 추종자와 반대자들까지 나서서 지난 2000년 동안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그 사건을 파헤치고 재구성하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수식어(修飾語)를 붙여 묘사했고 6하 원칙에 따라 설명했고 이유를 찾았습니다. 한 문장으로 표현됐던 사건은 한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만큼 대서사가 됐습니다7권으로 된 <소설 예수>도 그런 책 중 하나입니다

저는 ?’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왜 그 일이 문제인가?’

왜 그는 그렇게 자기를 버렸는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관념의 세계에서 벌어졌던 일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매일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의 세계로 가끔 걸어 들어가 한동안 이리저리 거닐면서 그를 생각하다가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한 기독교 기록 외에는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 예수>를 쓰기 시작할 때 6하 원칙에 따라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라는 기본 내용을 더듬는 일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아야 그가 그런 길을 걸었는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막상 그가 차지했던 역사적 자리는 애매하고 희미했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예수라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특히 1세기 지중해 동쪽, 로마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갈릴리지방과 유대지방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에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니라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역사 등 사람 중심의 환경, 그리고 기후 지형 지리 등 사람이 살아가는 자연 환경속에 예수라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고 21세기의 우리를 향해 걸어오도록 구성했습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예수처럼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자 예수가 십자가 가로 기둥을 메고 처형장을 올라갔던 그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모두 처절한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독 예수만 겪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서기 66년에 일어난 유대전쟁에서 예수의 동족 유대인들은 로마군의 칼을 맞고 창에 찔려 피 흘리며 죽었습니다. 성전은 불에 타 무너졌고 유대인은 살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1900여 년 동안 유대인은 세상을 떠도는 유랑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유대라고 부르던 이스라엘도 땅 위에서 사라졌습니다. 

 

     Nicolas Poussin -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at Jerusalem> 1637.

     147 x 198.5 cm The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예수는 폭력의 한복판에 몸을 던진 사람, 온 몸으로 폭력을 겪으며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 당한 연도와 시기를 <소설 예수>에서 중요하게 취급했습니다. 가능하면 예수가 살았던 시대와 처형 상황을 소설 속에서 상세하게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처형당한 해를 서기 33년으로 설정했고, 그 날을 유월절 전날이라고 썼습니다.

예수가 갈릴리에서 태어났을 무렵인 기원전 4년에 제국 로마는 유대 지방 예루살렘에서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치기 33년 전의 일이었고, 예수가 처형당한지 33년 후 서기 66년에 유대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유대를 휩쓸었던 제국의 폭력과 상관이 없는 일인가?”

<소설 예수>를 쓰면서 그 질문을 안고 씨름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행여 유대인들의 봉기를 촉진했다면, 가르침이 잘못됐거나 유대인들이 잘못 받아들인 결과였을 겁니다. 유대인들의 삶에 예수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었습니다. 한편, 뻔히 예견되는 유대인들의 봉기와 유대전쟁을 막으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실패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폭력과 예수를 다시 해석해야 했습니다.

세상을 휩쓰는 제국 로마의 폭력 통치 아래 살았던 예수입니다. 그를 역사적 사회적 환경(context)과 상관없이 구원자,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아들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일에 머무를 수 없어 <소설 예수>를 썼습니다. 예수가 이미 한번 그 길을 걸었으니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걸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왜 이런가?’

가슴에 품은 (Why)’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의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맞닥뜨린 세상에 반응하면서 새세상을 이루겠다는 꿈을 안고 살았습니다. 예수의 반응이 우리의 반응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희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예수의 걸음을 따라 걷다 보면, 그동안 우리가 눈 감았던 폭력이 보일 것입니다. 그 앞에 두 팔을 크게 벌리고 몸으로 막아선 예수도 만날 것입니다. 예수가 그러했듯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여전히 불평등과 억압과 세계 제국의 지배 아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체포되는 날 낮, 예수는 성전 뜰에서 외쳤습니다.  세상 폭력의 끝, 세상을 덮은 강고한 압제의 끝을 본 사람으로 외쳤습니다.

어떤 이름을 내세우든 선한 폭력과 압제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폭력이나 압제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나서서 네 원수를 네 앞에 굴복시키고 너 대신 복수해주마!’ 다짐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직접 폭력 앞에 나서야 합니다. ‘아니오!’ 크게 외치고 나서야 합니다.”

그러나 비폭력으로 저항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폭력에 똑같이 힘으로 맞서려고 하지 말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나도 당신과 똑 같은 사람이다!’ 외치세요.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세요!”  

 

사람은 씨고, 씨뿌리는 사람이고, 씨가 싹을 내는 마음 밭이라고 말하면서도 예수는 <소설 예수>에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달아나세요!’

죽음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지 말고, 삶의 뒷모습을 따라가세요!’

그가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는 생명이 자기 몫을 누리고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생명이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예수가 하는 말의 역설을 알아 듣는 사람이라면 그가 십자가에 매달린 뜻을 알 것입니다. 그는 다른 생명을 빼앗는 일도 반대하지만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일도 거부합니다. 사람이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야할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지배자나 권세가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21세기, 압제와 폭력의 구조적 일부로 기능하는 기독교, 강한 자들 편에 선 기독교, 권력자들과 움켜 쥔 사람들이 양심의 피난처로 삼는 기독교, 세계 제국의 등에 업힌 기독교, ()한 싸움에 앞장서겠다고 결연한 눈으로 다짐하는 기독교를 예수가 바라봅니다. 눈빛이 처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대들을 전혀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이제는 돌아 서시오, 그대가 누구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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