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십자가
<소설 예수>에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 가로기둥을 짊어지고
처형장 언덕을
오르면서 예수는 마음 속으로 빌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제자들을 위해 빌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길 사거리나 성문 앞 언덕, 십자가를 지고 비틀비틀
걸어 오르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꿋꿋하게 십자가를 지면서 세상 폭력을 이기겠다고 애쓰지 마시오! 십자가는 기꺼이 짊어지고 극복해야 할 고난이 아닙니다.
막다른 길이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세상 일에 개입해달라고 하느님에게 청원하는 몸부림입니다. 청원은 대답을
듣지 못하고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수는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대답하지 않는다는 사실, 대답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사실, 하느님이라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예수는 믿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끝없이
반복하여 겪는 실망입니다.
<소설 예수> 마지막 7권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처형됩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면 그가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압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라는 지혜로운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 처형했다.’
기독교 문서를 제외한
다른 역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언급은 이처럼 간단합니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나고
무슨 일을 했고, 왜 십자가 처형을 받았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받아 죽고, 장사한지 3일만에 부활하였다’는 고백을 바탕으로 기독교라는 종교가 시작됐습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십자가의 승리’라고 불립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부활을 통한 의義의 최후 승리를 나타내는 기호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형상을 장신구로 만들어 몸에 지닙니다.
<소설 예수>에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얼마나 수치스러운 처형인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처형인지 그려냈습니다. ‘부활’하기 위한 전단계로 겪는 의식이
아니라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십자가 처형’, 누구도
입에 올리기를 꺼려하는 사건을 눈 앞에 드러내려고 애썼습니다. 여러 자료 중, 특히 독일의 신학자 마틴 헹엘의 ‘십자가 처형’(Martin Hengel, ‘Crucifixion’)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예수야말로 한없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소설 예수>에서 히스기야와 바라바가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를 사람들이 알았지만 예수가 지고 오른 십자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세상을 품으려고 애썼지만 세상은 끝끝내 그를 밀어냈습니다. 간혹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결국 자기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왕관과 옷을 예수에게 입혔습니다.
예수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참혹해서 옷이라도 좀 입힐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Jean-Baptiste Greuze <Christ Crucified> 1760 로스엔젤레스 컨트리뮤제움 어브 아트.
'빈 무덤'을 남긴 부활이 있었기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는 누구일까요?
21세기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는 ‘부활 승리를 한 그리스도인가,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사람 예수’인가 묻고 싶어서 쓴 소설입니다.
<끝>
윤석철작가님.
답글삭제숙독했습니다.
Living with Jesus (예수살기)에
공유ㆍ전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韓賢實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