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 남자와 여자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남자와 여자

 

아이구! 그 젊은 나이에 장가도 못 가보고 죽다니…”

제 어릴 적, 친척 아주머니께서 예수가 아주 불쌍하다는 듯 안타까워하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당시 평균 수명이 20여세에 불과했습니다. 평균 수명을 훨씬 넘겨 살았으니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 죽기에 안타까운 한창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오늘 특별히 얘기하고 싶은 내용은 장가도 못 간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입니다. 선생과 제자 관계를 넘어 아주 특별한 남녀 사이였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마리아가 예수의 아내로 자식까지 낳았다는 흥미로운 얘기도 있습니다(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외경에서는 예수가 마리아의 입에 자주 입맞춤을 했다고 제자들이 불평하는 얘기도 나옵니다. 경전을 기록한 어떤 파피루스 조각에 나의 아내라는 말이 씌어 있는데 예수가 마리아를 지칭한 말이라고 해석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예수 당시의 사회에서 남녀 관계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키워드 중에 저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꼽습니다. 즉 결혼, 그리고 남자의 남성성(男性性)입니다.

그 시대에는 나이가 차면 모두들 결혼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나 마리아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그들이 특별한 이유 없이 각각 독신이었다는 점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남자는 끓어오르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여자만 보면 일을 저지른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야 남자답다고 생각했습니다. 홀로 있는 여자를 보고도 그대로 곱게 돌려보내면 그 남자는 바로 천하에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남자는 남자답기 위해 여자가 거절을 하든 말든 강압적으로 여자를 취했습니다. 처음에는 저항을 하던 여자도 결국 남자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남자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과 관습에 따라 물리적으로 남자의 영역, 여자의 자리를 갈라 놓든지, 여자를 보호할 권한이 있는 다른 남자가 그 자리에서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함께 있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두 사람 사이에 분명 성적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리에 홀로 몸을 드러낸 여자의 잘못, 여자의 책임으로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남자 위주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소설 예수>를 쓰면서 예수와 여제자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에 당시 사회의 관념과 관습을 그대로 반영하면 분명 자극적 내용으로 이야기가 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이야 흥미롭고 로맨틱하겠지만 저까지 나서서 또 하나의 스캔들 얘기를 보탤 이유가 없었고 더구나 자칫 예수 가르침의 본질을 놓칠 것 같아 무척 고민했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으니 늘 그로부터 가까운 거리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녀관계로 발전하지 않도록 막달라 마리아의 자리를 정해주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나사렛 마을 예수네 아랫집에 살던 동갑내기 친구 히스기야를 등장시켰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히스기야를 연인관계로 설정하고 그들의 가슴 아픈 연모를 그렸습니다. 예수는 그 두 사람이 연을 이어가도록 주선해주는 선생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설정하니 예수와 마리아가 새벽녘에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의 집 뒷동산에 가까이 앉아 가르침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베다니 마을 여인숙 문 앞에서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슬프고 배고프고 가슴 아픈 일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어머니 역할을 맡으라고 예수가 마리아에게 부탁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예수는 남자가 아니라 선생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 그리고 안타까움을 통해 예수가 어떻게 아직도 우리의 선생이 될 수 있는지 소설 속에서 그려내려고 애썼습니다. 운명 결정론적 삶을 살아야 하는 1세기의 사람 예수가 자기가 선택한 길, 아무도 걸어가보지 못한 길을 혼자 외롭게 걷는 모습을 마리아가 지켜봅니다. 그를 따른다는 제자들, 그를 섬기는 기독교라는 종교와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덧 입힌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으로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는 과정을 <소설 예수>에서 그렸습니다.

예수는 기독교를 통해 굳어지고 뭉친 그리스도가 아니라 뜨거운 속살을 지닌 사람 예수21세기를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걷습니다.

“’를 부인하고 고난의 길을 걸으라!”

를 초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속에 매몰된 ’, 시대가 운명 지워준 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를 세우면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는 말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예수는 초월을 가르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꽉 붙잡고 다른 사람을 로 받아들여 끝까지 사랑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을 하느님에게 이끄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 사람 속에 스며들고 와 하나가 되어 숨쉰다고 가르쳤습니다.

<소설 예수>에서 사람의 돌로 된 심장이 살로 된 심장이 되는 날을 앞당기려고 예수는 그 몸을 세상 폭력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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