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묻는다 - 나와 우리 3
예수가 묻는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는 끊임없이 자기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나’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동체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당연히 나의 정체성으로 삼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서슴없이
얘기했습니다.
“갈릴리 사람 하나를 알면 모든 갈릴리 사람을 아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마 사람 하나를 알면 모든 로마 사람을 아는 것이다.”
“한 사람의 어부를 알면 모든 어부를 아는 것이고, 한 사람의
목수를 알면 모든 목수를 아는 것이다.”
정형화, 일반화의 오류라지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와 다른 ‘나’를 주장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공동체에 위험을 끼칠 사람이거나 나쁜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는 무척 달랐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문제를 그도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성큼 21세기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은 사람이었습니다.
Paul Gauguin
oil on canvas 139 × 375 cm. Museum of Fineart, Boston, USA
‘나는 어디서 왔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존재存在로서 ‘나’를 생각했습니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루려는 세상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삶이란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주저하지 않고 어느 한쪽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걸음 끝에 해골바위(골고다) 언덕에서
그는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제 관심은 <사람 예수>와 그가 걸었던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으로 세상을 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부릅니다. 예수가 바로 오랜 세월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고 문서로 처음 고백한 사람은 스스로 사도使徒(Apostle)라 자처한 바울(Paul)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직접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지만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계획이 예수를 통해서 작동됐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복음서福音書(Gospel:
Good News)를 기록한 저자들은 제3층 전승을 기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신약성서(New Testament)라고 부르는 모든 문서는 외부인이 아니라 이미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문서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문서는 저 문서를 근거로 삼고,
저 문서는 이 문서를 근거로 삼고, 미흡하다고 생각하면 구약성서(Old Testament: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히브리성서라고 부릅니다.)를
인용하여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씁니다.
저는 <소설 예수>에서 기독교 교의(Dogma) 이전의 예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의 자기 인식(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이 기독교의 고백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공동체가 기대하는
‘우리 속에 함몰된 나’에서 벗어났습니다. 자기를 깨달은 무수한 ‘나’가
이룬 공동체 ‘우리’ 속에서 새 세상을 이뤄 살아가는 길을
얘기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붙잡고 매달렸던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이 사람에게 베풀어준 사람의 나라’라는 뜻이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아주 독특한 말을 사용합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人子)”
기독교에서는 다니엘서
등 예언서를 인용하며 예수가 자기를 지칭한 말로 고유명사처럼 이해합니다.
<소설 예수>에서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 2000년 후 살아가는 ‘우리’까지 포함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예수가 이 말을 사용합니다.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 ‘사람’과 ‘아들’입니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인간입니다.
그러니, ‘나’와 ‘우리’에 대한 이해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어떻게 표현됐는지, 그의
걸음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소설 예수>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자기인식은 존재 ‘누구(Who 즉 Being)’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Doing)’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시작점입니다.
예수의 자기인식과 달리
기독교는 그를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메시아로 태어나서 메시아적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세상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며 희생제물이 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예수’
<소설 예수>에서 예수는 그런 고백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만난 예수가
들려준 얘기를 소설로 기록했습니다. 소설이기에 허구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당연히 ‘그랬을 수밖에 없는 얘기’였습니다.
<끝>
윤작가님, 드디어 소설 예수가 완성되었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답글삭제그런데
요즘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개인주의, 집단주의, 관계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적인 집단주의 관점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신자로서 교회에서 신앙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려고하나,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관계주의 관점에서 요구되는 유연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가 용이하지 않아서 갈등하게 됩니다.
반면에 서구식 개인주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아들인 예수를 이해하고,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한다면 좀더 쉽게 예수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좋은 글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설 속에서 예수는 집단 속에 매몰된 개인이 개인으로, 자기로 일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서 '나'를 찾은 일의 결과로 '우리 집단'에서 배척 받은 셈이지요.
답글삭제이제 7권까지 끝을 냈습니다. 제가 소설을 통해 하려는 얘기는 제도 종교(Institutionalized Religin) 기독교는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교라는 점입니다. 4권 그리고 6권에 랍비 유대교의 창시자인 요하난 벤 자카이와 만남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변질될 것인지 내다보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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