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와 '우리 마누라'
21세기와
‘우리 마누라’
“오늘 우리 마누라가 대단히 화가 나 있어서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해!”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듣습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부인이 화가 나 있어서
일찍 들어가서 달래 줘야 한다’는 말로도 들리고, 저녁 식사하면서
술 한잔 하자는 말을 거절하는 핑계로도 들리고.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해서 외국인에게 들려주면 어떨까요?
한국을 좀 이해하는 사람이면, ‘우리 마누라’가
‘내 아내’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 들을 겁니다. 한국 사람의 언어 습관이 ‘나’라고
말해야 할 때 ‘우리’라는 말을 쓰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집에 들어가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집에 들어갈 때 장미 꽃 한 송이 사가라고 슬쩍 충고할지도… 평소에
않던 짓을 하면서 남편이 사과를 하면 아내는 못이기는 체 눈 감고 넘어가준다고 사람들이 믿습니다. 장미
꽃과 사과해야 할 내용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지만, 꽃을 들고 오는 그 마음을 아내가 알고 남편도 아내가
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위 한 줄 짧은 문장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우리와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동시대의
외국인은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에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만일 이 문장을 아람어(Aramaic. 1세기 예수가 사용하던 언어) 또는 히브리어(예수 당시에는 이미 죽은 말이 되어 사용하지 않던
이스라엘의 고어古語)로 번역해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들려 주면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들려주면 그들은 전혀 못 알아 들어서 아람어로 다시 들려주어야 할 겁니다.
아람어로 들려주면 알아 들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화를 낸다는 일을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고 남편이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집에 들어간다? 남자가 밖에 일보다 집안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집에 가야 한다’는 말을 화가 난 아내 때문에 더 화가 난 남편이 집에 가서 아내를 때리든지 벌을 주겠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의 삶도 21세기 한국인의 삶과 비슷하기 때문에 영어로 번역하여
들려주면 대충 뜻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1세기 어부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줄의 문장을 단순히 그 시대의 아람어로 아니면 지금 세상처럼 영어로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로는 불충분합니다.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그가 살아가는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context)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누라’를 ‘내 아내’로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언어적 습관을 알아야 하고, 왜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지 이해하려면 한국인이 살아가는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21세기의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기록을 손에 들고 21세기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바로 기독교의 신약성서(New Testament)가 그러합니다. 1세기 초 예수의 가르침이나
그의 제자들이 전한 말을 전해 들은 사람에게서 또 전해들은 사람들이 기록한 내용을 1:1로 번역하기를
거듭한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어떤 기록도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된 것은 없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지 40년 후에 전해들은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사람이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한
문서가 복음서(Gospel)입니다. 두 번 세 번 건너 전해지는
과정과, 아람어 이야기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전하는 사람, 그것을
듣는 사람, 그리고 번역하여 기록하는 사람의 환경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제까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예수가 한 없이 멀어집니다.
<소설 예수>는 1세기 지중해 연안의 사회환경(Social Context) 속에서 살고
죽은 예수를 그렸습니다. 쓰기를 시작할 때까지 2005년부터
10년 넘게 준비했고, 2016년 집필을 시작한 이후에도
공부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1세기
사회환경 속에 재구성하는 작업이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 좌절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들판을 걸었고, 강가를 걸었고, 유럽에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10시간 내내 2000년 전 갈릴리로 돌아가 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바라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1세기 환경을 그려내고 예수와 등장 인물의 성격을 설정하니 그들의 말과
걸음을 받아 적고 따라가며 기록하는 일로 바뀌었습니다. 억지스럽게 창작하기 보다 그 시대 그 환경에서
그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을 일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소설 예수>
7권 원고를 <나남 출판>에 보내고
가만히 눈 감고 생각하니 지난 16년 반의 세월동안 들어왔던 예수의 독백이 가슴 아프게 와 닿았습니다.
“나는 이럴 수밖에 없었오!”
1세기 환경 속에서 살다 죽은 예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끌어 안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마주한 첫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21세기 오늘 날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가 처음 걸었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른 사람일 것입니다.
2000년 전 살았던 그를 만나는 일이 지금 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거기에서 살았다면, 그때의 예수처럼
반응하면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민주주의, 남녀 평등, 인권, 생명권, 생존권)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던 21세기
사람으로 1세기의 억압세상, 하느님과 성전과 지배체제와 로마제국의
억압을 엎드려 수용하면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1세기의 환경을 살아낸 사람이면서 21세기의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는 ‘보편적 사람’입니다. 우리가 ‘내 아내’를
‘우리 마누라’라고 소박하게 부를 때 그 ‘우리’라는 말을 알아 들을 사람입니다. 그가 살았던 세상도 ‘나’를
‘우리’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1세기에서 ‘나(Individualism)’와 ‘우리(Collectivism)’를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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