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수치

 

<명예와 수치>

평소 늘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찾아와서 손을 벌린다면?

내가 이번에 대출금을 못 갚아서 신용불량자가 되게 생겼어!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언제든 형편이 풀리면 꼭 갚을게! 부탁이야!”

여러 번 사업을 실패해서 들어먹고, 집도 없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고, 형제들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사람, 그가 손을 내미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신용불량자, 신용카드도 못 만들고, 은행에서 단돈 1원도 빌릴 수 없는 형편이 되면, 주위에서 사람들이 점점 떨어져 나갑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거나 다른 약속이 있어서 바쁘다며 전화를 끊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는 은행 잔고, 아파트 평수, 연봉, 퇴직금 액수, 자식들이 어떤 직장에 들어가서 월급이 얼마나 받는지, 바로 그런 일들이 사람의 성공을 재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라도, 재산만 많으면 예전 신분사회의 계급처럼 높게 쳐다봅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설 예수>의 역사적 무대, 예수가 살았던 1세기 지중해 연안 그 땅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재산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듯, 예수 시대에는 명예(Honor), 그리고 수치 (Shame)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재산이 그러하듯 태어나면서부터 내려 받는 명예가 있고, 자수성가한 사람처럼 업적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명예가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 얻게 되는 명예는 가문, 혈통 (유대인, 이스라엘), 지방 (유대, 예루살렘) 또는 나라(이방이 아닌 유대)에 따랐습니다. 태어나면서 획득한 명예가 아니고 사람의 업적에 따른 명예라면 스스로 주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고 인정해주는 평가에 따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정체성(Identity), 가문의 정체성을 확인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명예는 이름(Name)입니다. 좋은 집안이라는 이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좋은 이름(Good Name)을 얻으려면 마을이든 지방이든 공동체가 지키는 가치와 규범을 잘 지키고, 그런 가치를 위협하는 사람이나 이웃이 있으면 나서서 싸워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자면 사회적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여야 합니다.

남자에게 명예라는 가치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수치라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남자가 명예를 잃으면 수치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명예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없는 여자에게는 남자의 수치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수치를 잃었다. 수치가 없다. 수치도 모른다 (Shameless)’라는 말을 썼습니다. 남자의 명예는 밖(Outward)으로 뻗어 나가는 개념이고, 여자의 수치는 안(Inward)으로 오므려 드는 가치라고 보았습니다.

남자는 밖에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 일을 하고, 남자는 공동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에서 가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의 일과 장소가 있고, 여자에게는 여자의 일과 장소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역할을 하거나 여자의 장소에 들어가면 수치스러운 일이고,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하거나 남자의 장소에 나오면 수치도 모르는 여자가 됩니다.  

여자의 수치는 남자가 지켜줘야 했습니다. 아버지나, 남자 형제나, 아들이나. 그래서 아들 없는 과부가 되면, ‘수치를 지켜줄 사람을 잃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여자는 결혼을 해서도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남편 집안의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는 언제나 친정 남자들이 결혼한 여자의 수치를 지켜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습니다. 그럴 만한 친정이 없다면 아주 슬픈 여자가 된 셈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재산이 그러하듯, 원한다고 누구나 명예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때 당시에 재물이란 아주 유한(Finite)한 것이었듯 명예 또한 유한했습니다. 한 마을이나, 어떤 사회에서 한 사람이 명예를 과도하게 독점하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명예가 줄어들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유한한 명예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이미 명예를 누리는 사람은 잠재적 도전자를 경계하고 혹 누가 도전하고 나서면 분명하게 대응해서 눌러야 자기 명예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도전에 응하지 않고 피하거나 잘못 대응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이 패배라고 말합니다. ‘아무개는 수치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즉 재산을 잃은 사람, 파산한 사람,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 취급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시대의 명예는, 그리고 여자들의 수치는 오늘날 돈 재산 경제력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예수 시대에, 남자가 밖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는 명예를 다투는 대화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응전하고, 빼앗고 지켜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을의 명예, 가문의 명예, 한 집안의 명예, 지방의 명예, 하다 못해 석수나 목수, 어부나, 농사꾼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직업에 따른 명예가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농촌에서, 벼 두 가마니를 지는 사람과 벼 한 가마니를 겨우 지게에 짊어지고 비척거리는 사람을 동네 사람들이 달리 취급했던 것처럼.

이런 환경 (Context) 속에 <소설 예수>를 짜 넣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마을, 목수 석수 출신 예수가 목수 석수들의 세계를 벗어 나면 그에게 주장하거나 내세울 다른 명예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설사 그가 주장한다고 해도 누가 그것을 인정해주겠습니까?

그가 선생이 되고 치유자(이 부분은 치료와 치유, 그때 병의 개념에 따라 나중에 별도로 쓰겠습니다.)가 되어서 나타났을 때, 아무도 인정해줄 수 없는 좋은 이름(Good Name)을 스스로 주장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식일 아침, 나사렛 마을 회당에서 예수는 마을에서 쫓겨났습니다. 마을 촌장과 <소설 예수>의 주인공 나사렛 예수가 서로 충분히 나눠 누릴 만한 명예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명예가 올라가면, 촌장의 명예는 내려가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명예를 둔 경쟁은 예루살렘성전과의 충돌까지 이어집니다.

선생인 예수 본인 뿐만 아니라 제자라는 사람 그 누구도 명예를 주장하고 내세울 만한 배경이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 번도 명예를 가져본 적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누구도 눈을 주지 않던 빈민, 하층민 출신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 일행 중에는 수치를 잃었다는 평판을 받았던 여자들까지 끼어들어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는 자기들 같은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는 나라라고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북 치고 장구 치고 피리를 불면서 광대패가 한양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양반의 도시 한양, 임금님이 사는 도시 한양에서 광대패는 구경거리였지요. 마당극을 펼치면, 심심하던 사람들은 어깨춤을 추면서 어울리고, 탈춤이 벌어져 양반을 조롱하면 모두 박수를 치면서 속이 시원했겠지요.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는 것은 마치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가 은행 문 앞에 서서 외치는 것 같았을 겁니다.

여기 은행 돈은 다 내 것 입니다. 누구든 오세요! 담보도 필요 없습니다. 이자도 안 받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습니다.”

명예와 돈을 비교하다 보니까 너무 희화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명예를 주장할 수 없는 예수가 그의 명예의 근원을 하느님에게서 찾고, 하느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니 당시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고 엉뚱하고 허황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타고난 명예를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그를 내세웠다는 근거를 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예수가 가장 수치스럽고 끔찍한 일,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몸은 하루하루 사라졌지만, 그나마 어찌어찌 나름대로 쌓았던 명예는 십자가를 지고 채찍을 맞으면서 언덕에 오를 때 몸이 사라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종교적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도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설 예수>도 그런 기대를 다뤘고, 신학적 의미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살았던 그 시대를 <명예와 수치>라는 분석의 틀을 통해 사회학적으로 살펴보면, 21세기에서 <, 재물>이라는 틀로 살펴 보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보게 됩니다.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가 시대를 붙잡고 얼마나 몸부림치며 고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그건 제자들을 향한 신학적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이 신앙고백일수만도 없습니다. 그 사회의 핵심 가치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소설 예수>를 읽으실 때, <명예와 수치>라는 핵심가치를 열쇠말(Keyword)로 삼으면 예수의 고민과 한계를 좀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공동체가 공통으로 지켜야 하는 가치와 예수가 어떻게 충돌했는지 다음에 <1세기의 공동체와 개인>을 다룰 때 쓰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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