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 속 독일 시골역
<홍수 속 독일 시골역>
서유럽이 폭우와 홍수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던 바로 그 무렵, 그 중심지에 속하는 도시, 독일 뒤셀도르프를 방문했습니다.
차량이나 항공편보다는 비교적 안전하게 생각되는 도시간 급행열차(ICE : Inter-City Express)를 타기로 했습니다. 뮌헨역을
출발하는 오전11시 열차가 취소돼서 2시간 후에 출발하는 다음
열차를 탔습니다. 원래는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도 회의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충분하리라 생각했지만, 전날 그 도시에 도착해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아내의 권유를 따른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5시간 좀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집에서 출발한지 13시간 만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요.
기차는 가다 서다 여러 번 거듭하면서 그 유명한 독일 ICE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얼마나 고생해서 출장을 다녀왔는지 그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혼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저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부끄러운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기차는 목적지까지 50여킬로 미터를 남겨 놓고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폭우와 홍수에 나무들이 쓰러지고 철로가 훼손되어 열차가 앞으로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이미 지나온 도시로 물러갈 수도 없는 형편이 됐고, 시간은 밤 10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조그만 역에 정차한 기차에서 그 많은 승객들이 무거운 짐을 끌고 내렸습니다. 아기를 둘씩이나 데리고 무거운 짐을 끄는 아기 엄마도 있고,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역시 비척거리며 걷는 할머니가 부축해서 모두 그 조그만 역사로 몰려갔습니다.
그 부근에 이미 비상사태가 발령되어 모든 교통수단과 긴급구호
수단은 홍수에 휩쓸린 마을에 투입됐기 때문에 그 조그만 시골 역에는 버스도 택시도 그리고 안내요원도 없었습니다.
‘이건 전혀 독일
답지 않다’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전혀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열차승무원은 택시를 타고 뒤셀도르프에 가고, 14일 이내에 영수증을
제시하면 택시요금을 독일철도(DB: Deutsche Bahn)에서 지불해준다는 말만 했습니다. 조그만 시골 역에 한밤중에 그 많은 사람들을 실어나를 택시가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속이 탔지요. 짐이래야 배낭과 조그만 가방 하나뿐이라서 저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고, 재빠르게 택시타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미
수십 명, 수백 명이 저보다 먼저 도착해서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이 40~50쯤 돼 보이는
독일 여자분의 맹활약으로 저와 다른 젊은이 한 사람, 그렇게 세 사람이 남보다 먼저 택시를 타고 뒤셀도르프
역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뒤돌아보니 그 조그만 시골역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고, 택시는 어둔 밤길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차를 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 뒤에 남아 있을 사람들, 저와
눈길이 마주쳤던 사람들 모습이 자꾸 저를 뒤로 잡아당겼습니다.
먼저 택시를 잡은 동남아에서 출장 왔을 법한 젊은이들 세 사람에게
독일 여자분이 날카롭게 외치고 택시를 잡아챘습니다.
“내가 부른 택시예요!”
정장차림의 세 사람은 택시문을 열었다가 우리에게 그대로 차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라는 듯 턱으로 눈으로 보내는 그 여자분의 신호를 받고 제일 안쪽 자리에
냉큼 올라탔지요. 어린 아기들 손을 잡고, 무거운 짐을 끌고
겨우 줄 맨 끝에 가서 서는 아주머니가 보였고, 절뚝거리는 할아버지를 이끌고 온 할머니는 아직 택시타는
길을 건너오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뒤셀도르프 역에 도착하면 마중 나온 사람들 도움이 있어야
옮길 수 있을 만큼 무거운 짐을 끈 사람들이 수도 없이 보였습니다. 1000명도 넘는 사람들의 긴 행렬과
느릿느릿한 움직임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맹활약을 한 그 여자분을 비난할 생각으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그 분은 어리벙벙해 보이는 70넘은 동양 노인 하나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으니까요. 택시요금을 세사람이 나눠내면 경제적으로 이득이라는 생각 때문에 저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고, 그냥 안돼 보이는 늙은 사람이라서 저를 찍었을 수도 있고…
그런데, 열흘 가까이
지난 그 일이 여전히 마음에 맴돌고 떠나지를 않습니다.
제가 전해들은 어느 진보 정치인의 얘기가 떠 오릅니다. 그분은 아주 보수적인 도시, 오랜 교육 도시, 그러면서도 예의를 잘 지킨다는 도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런데
그곳 보수적인 어른들이 그 의원에게 물었답니다.
“박의원! 진보라는 것이 도대체 뭐요?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어!”
“예! 어르신! 어느 마을에 어른들이 70명이
사시는데요. 경로관광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는 50명만 탈 수 있어서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얘기하다가 이번에는
50분만 모시고 가고, 남은 20분은 언제든 기회가 오면 별도로 다시 모시고 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답니다.”
그러자 어른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답니다.
“안되지! 한마을에 살면서 그러면 안되는 법이여! 좀 좁혀 앉고, 교대로 앉고, 불편하더라도 70명이
다 함께 가야지… 사람 사는 일이 그런 거 아녀!”
“예! 그렇지요? 진보는 좀 불편하더라도 70분 어르신을 다 모시고 가자는 사람들이고, 보수는 자리가 없으니
우선 50분만 모시자고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극히 단순화한 얘기지만 그 이후로 그 도시 어른들은 진보와
보수가 무엇이지 어렴풋이 이해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옳은 설명인지 잘못된 애기인지 여기서 따지자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는 우선순위, 공정, 경쟁을 앞세우면 언제나 이길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은 사람, 이긴 사람, 선택된 사람, 낭패를 덜 본 사람, 어벙벙해 보여서 택시를 얻어 탈 수 있었던
사람의 얘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편으로는 두 아이를 안고 업고 무거운 짐도 끌어야 하는 엄마,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겨우 한 걸음씩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던 할아버지 할머니,
말도 잘 안 통하는 나라에서 자기에게 온 기회를 그냥 빼앗긴 동남아시아의 세 젊은이처럼 억울하고 속상한 경우도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들었던 얘기가 떠 오릅니다. 50여년전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들 여러 명이 시험에서 커닝(남의
시험지나 답안을 베껴 쓰는 행위)을 하다가 교수님에게 발각됐답니다. 필수전공
과목이라서 만일 그 과목에서 커닝의 벌로 F학점을 받으면 졸업을 못할 처지에 빠졌습니다.
그때 그 교수님은 학생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타이르고 다짐을
받고 졸업을 할 수 있는 점수를 주었답니다. 그 교수님의 가르침을 떠 올리며 눈물 글썽이던 사람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는 서울 법대생이다.
너희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면, 너희보다 못한 사람은 이세상을 어찌 살아가누?”
그 한마디 가르침만으로도 자기에게는 그 교수님이 평생의 스승이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소설 예수>를 쓰면서, 삶과 글이, 생각과
몸이 철저하게 분리된 제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소설의 서문에서도 밝혔듯, ‘깨달은 대로 살지 못했으니 글 쓰는 것으로 눈 감아 주세요’ 예수에게
사정한 후에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만으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날
몸은 택시를 타고 남보다 먼저 뒤셀도르프로 떠났지만, 영혼은 그 조그만 시골 역에 남겨두었던 것 같습니다. 옳게 처리하려면 영혼을 지금 여기로 불러오는 대신 몸이 그곳을 다시 찾아가 비 맞으며 서 있을 영혼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 예수>를 쓰는 일은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야할 것 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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