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살고, 소도 살고
어버이날이 다가오니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더욱 커집니다.
1922년생이셨던 어머니는 우리 나이로 93세가 되셨던 2014년 3월 1일, 8남매 딸 아들, 며느리 사위와 손주 손녀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셨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점점 사그라지더니 어느 순간 마지막 숨을 내 뱉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자주 쓰게 되는 말 하나를 만났습니다.
“태어나서 첫 숨을 들이 쉬고,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숨을 내쉰다. 첫 숨에 하느님이 들어오고 마지막 숨으로 하느님이 몸을 떠나신다.”
독실한 신앙을 지닌 많은 분들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 태중胎中에 있을 때부터 나를 지켜보았던 하느님 은혜를 고백하지만 저는 그저 첫 숨과 마지막 숨으로 경계를 삼습니다.
어머니가 낳고 젖 먹여 기른 8남매 앞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병상에 계신 동안 하실 말씀 미리미리 다 남기셨고, 한 사람씩 이름 불러가며 고맙다고 하셨던 어머니는 막상 마지막 숨을 쉬실 때는 아무 말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입원하시긴 전, 어머니는 막내동생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독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평생 공자 맹자의 도를 말씀하시며 자식들을 가르치셨던 분이 세례를 받으신다고 해서 의아한 마음이 들어 여쭈어 보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자식들이 한마음으로 장례 치르라고….”
그도 그럴 것이 8남매 중, 기독교 목사 장로 집사도 있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 절에 다니는 동생들, 그리고 효孝와 우애友愛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동생도 있습니다. 숫자로 보자면 기독교인이 많아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겠지만 자식들 중 한 사람도 장례절차 모시면서 불편하지 않도록 아예 당신이 기독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 뜻을 받아들여 목사 아들이 임종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식으로서 그동안 어머니가 보이셨던 현명한 처신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을 종종 떠 올립니다.
“놔둬! 개도 살고 소도 살아!”
형이라고 오라비라고 동생들 가르친답시고 한마디 하려고 하면 어머니가 말리셨습니다. 연세 드시면서 어린 동생들 잘못 가르친다고 그 때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세월이 지나 생각하니 그건 저나 큰 자식들에게 남긴 교훈이었습니다.
평생 공맹지도孔孟之道를 입에 올리셨던 어머니가 교육이나 훈육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떨어져 살던 형과 오라비가 오랜만에 집에 내려와 어린 동생들에게 훈계한다고 시끄러운 소리 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신 것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기보다 안아주고 받아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셨습니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남다른 우애를 나누며 자기 몫을 다 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늦게 눈을 떴습니다.
저는 <소설 예수>에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같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여러 번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말씀, ‘개도 살고 소도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삼나무와 백향나무만 들어선 울창한 숲이 아니고, 큰 나무 작은 나무, 풀도 있고 돌도 있고, 개미도 살고 뱀도 살고, 조그만 냇물이라도 졸졸 흐르면 더 할 수 없이 좋은 조화로운 삶, 어머니는 그 곳을 보고 계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공부 잘하고, 많이 하고, 번듯한 직장 잡아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런 날들을 기대하기 보다 서로 아끼고 돌봐 주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큰 교훈이 숨어 있었습니다. 자식이 많다 보니, 그리고 자식들 마다 하고 싶은 것이 다르다 보니 어느 한가지 방향으로 일제히 몰리고 쏠리기보다는 제각각 다른 현장에서 다른 소리를 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지향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자식들이 서로 아끼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배움이나 직장이나 수입이나 하는 일이 비슷해야 가능한 일 아니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네가 하는 일은 덜 중요하다’고 말한다면 모처럼 모여서 밥 한끼인들 편히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머니 말씀은 ‘개가 되고 소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개도 소도 각각 제 몫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치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나’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새로 이뤄야 할 세상을 예수는 ‘겨자씨가 자라나는 세상’이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개도 소도 사는 세상’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다른 기독교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가면 눈감고 달달 외우는 ‘주님 기도’나 ‘사도 신경’을 한 마디도 모르고 돌아가신 어머니셨지만 그 가르침은 예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건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하늘이 슬쩍 문을 열어 보여준 깨달음이 아니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하늘이다.”
비단 저희 어머니 아버지만 그러셨겠습니까?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어렵게 살다 보니 기를 쓰고 내 자식은 잘 가르쳐 남보다 잘 살게 하고 싶어 그분들은 밤낮으로 힘든 일 하며 세상을 살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개도 살고 소도 사는 세상’이 옳은 세상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지금 살아 숨을 쉬는 우리는 ‘개도 살고 소도 사는 세상’을 꿈꾸셨던 분들의 아들과 딸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는 마음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소설 예수>는 그 길을 내딛는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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