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ding 들판에서
Erding 들판에서
5년 전, <소설 예수>를 쓰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뮌헨 동북쪽에 있는 조그만 도시 Erding. 그날, 유난히 햇빛이 좋았습니다. 독일에서는 햇빛 좋은 주말이면 도저히 집안에 앉아 글만 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면 밝은 햇빛이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들에 나가라! 공원에 가라!”
유혹을 견디며 버티다가 채 1시간도 못돼 노트북을 덮고 들에 나갔습니다.
늘 하던 대로 들판을 가로 질러 멀리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조그만 개울을 따라 죽 이어진 작은 숲에 이르렀습니다. 들에 나가면 으레 들르던 십자가가 그 곳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와 그 위에 매달린 예수의 상, 특별할 것도 없는 형상입니다. 어느 마을에 가든, 그저 쉽게 눈에 뜨이는 그 십자가가 그날 유난히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Maria und Paul Earl 1918>
십자가 기단에 새겨진 글을 그동안 무심히 보아 넘겼는데, 웬일인지 가슴 저 아래아래 깊은 곳에서 찌르르 울림이 서서히 솟아 올라왔습니다. 100여년 전이면 그 들판은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는 곳이 분명했을 겁니다.
‘이 분들은 왜 100여년 전에 이곳에 십자가를 세워 놓았을까?’
1918년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두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4년 동안 싸우다가 들과 산에서 쓰러졌습니다. 그 전쟁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까? 십자가가 세워진 그 자리에서 누군가 숨을 거두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십자가 아래에 모자를 벗고 두 손을 모으고 서서, 한참 상념에 잠겨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지역에서 로마제국 통치에 저항한 반란세력이나, 정치범이나, 도망한 노예를 처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아 매달아 놓고, 고통 속에 천천히 죽어가도록 매달아 놓는 고문이었습니다. 쉽게 죽지 못한 사람은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잔인한 고문과 처형도구가 지금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십자가의 이미지로 변하기까지는 상징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고, 기독교가 고백하듯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큰 계획을 상징하고, 사람들을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간 예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제국의 잔인성과 폭력성 대신에 십자가에 매달렸던 분의 사랑과 화해 용서를 상징합니다. 세상 권세자 대신에 그 권세자에 의해 높이 매달린 사람의 신성神性을 상징합니다.
사실 제가 쓰고 있는 <소설 예수>는 신의 아들, 메시아, 우주의 구원자 예수의 얘기가 아닙니다. 끼니거리를 걱정하는 갈릴리 빈한한 집의 맏아들 예수가 어떻게 세상을 살았고, 왜 십자가에 매달려 사라졌는지 ‘사람의 얘기’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기독교가 고백하는 예수의 신성 대신에 인간 예수의 ‘사람 됨’에 눈길을 둔 이야기입니다.
‘지난 100여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초라한 십자가를 Erding 들판에서 올려다보면서 위로를 받았을 것인가?’
100여년 전에 그 자리에 세워진 십자가를 보면서 소설의 내용을 일부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2000년 세월동안 사람들을 위로하고 새세상의 희망을 주었던 십자가를 대책도 없이 제 소설 속에서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위로를 받고 소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서 ‘그분이 주는 위로’를 그냥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설 예수> 1권 마지막 부분 얘기를 바꿨습니다. 예루살렘 길에 오르는 날 새벽,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의 집 뒷동산에서 예수가 그를 따르는 여제자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부하는 장면을 넣었습니다.
“세상에는 깨달음으로 앞날을 살아갈 사람도 있지만, 상처 받고 고통을 겪으며 살아온 지난 날에 대하여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그런 사람을 먼저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마리아가 그 일을 맡으시오.”
밝은 햇빛아래에 서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듯 보여도 그 빛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명확하게 밝히고 해석하고 샅샅이 헤아리는 것보다 때로는 부드러운 달빛아래 그저 희미한 형상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삶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건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그 아픔을 공감하고 동감하고,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으로 어루만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곳에 가든 십자가 아래 서면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위로해 주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소망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 마음을 제가 <소설 예수>로 너무 삭막하게 하지 않도록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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